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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밝넝쿨 안무가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경계, 선명하지 않아도 진실에 가까운 쪽으로”



춤을 추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갈수록 생전 궁금해 본 적 없던 물음을 마주하게 된다. 춤추다 말고 문득, 춤의 근원에 관한 물음표들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 대체 춤이란 뭘까?

다소 모호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런 물음들은 어떤가. 어디까지가 움직임이고 어디서부터 춤이라 불릴 수 있는 걸까?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경계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인류가 춤을 추기 시작한 이래 많은 이들이 유사한 물음을 던졌을 테고, 또 나름의 방식으로 답을 구했을 것이다. 진실은 내가 지닌 춤의 경험으로는 아직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다. 어쩌면 춤추기 시작한 자라면 한 번쯤은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일지도 모른다. 답을 구하는 과정을 건너뛰고서는, 어쩐지 다음 단계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듯한 예감이 강렬하게 스친다. 

비슷한 물음을 오랫동안 품어온 이를 만나보기로 했다. 오!마이라이프 무브먼트 시어터(Oh! My Life Movement Theater)의 대표이자 ‘몸과 춤의 가능성’을 화두로 무용수, 교육자로서 춤을 탐구해 온 밝넝쿨 안무가이다. 만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대화는 물음의 중심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춤과 움직임의 차이라. 무엇이 춤이고, 무엇이 춤이 아닌지 나누는 논쟁 자체가 진실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춤과 춤이 아닌 것이 섞였을 때. 서로를 잡아 먹고 잡아 먹히면서 그 혼돈 속에서 보이는 아련한 것들이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아직 흡족할 만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나는 관객을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선명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진실에 가까운 쪽으로. 



‘춤과 경계’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물음을 두고 이렇게나 입체적이고 멀리 뻗어갈 수 있다니. 관객을 진실에 가까운 쪽으로 안내하는 일은 그동안 밝넝쿨 안무가가 몸을 바탕으로 춤의 본질을 탐색해 온 시간과 맞닿아 있었다. 


무용의 관점에서 몸의 진화를 보면, 앞이 아닌 뒤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감각을 회복하는 것, 몸에 불필요하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치우는 것. 동양의 관점으로 몸을 이해하면 쉽다. 필연적으로 자연스러움을 표방하게 되니까. 자연스러운 몸의 운동은 우리가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보편적으로 일상에서 쓰는 움직임, 몸의 에너지 체계를 받아들여 춤으로 적극 활용해본다. 이런 인식 과정에서 원천적인 질문을 가지고 춤을 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춤은 태생적으로 몸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춤의 본질은 ‘몸’에 있는 것일까? 몸을 중심에 두고 춤을 상상하는 순간,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몸으로 춤의 가능성을 제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리적 몸의 한계 역시 신랄하게 드러나고 있다. 매너리즘에 갇히기 쉽고.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전부 수용해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쉽다. 당연히 부딪쳐야 하는 이슈다. 요즘은 다른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몸을 중심에만 두고 보느라 몸을 떠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 보통 안무가가 자신의 작업을 멀리서 놓고 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협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춤과 춤이 아닌 것이 단일한 경계를 갖는 건 아닐 것이다. 경험상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서 내가 내 춤의 껍질을 벗겨볼 수 있었다.




밝넝쿨 안무가는 2005년 무용단을 만든 이후, ‘몸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물리적 몸의 한계 역시 매 순간 직시하면서. 몸을 가지고 얼마든지 춤을 말할 수 있지만, 몸을 떠나서도 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춤이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찰나 적극 연극연출가를 만나게 됐다. 무용계 바깥의 시선을 가진 연출가 동료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것이 <댄스를 부탁해 ‘5’>이다. 안무가가 가진 춤, 연출가가 가진 춤이 아닌 것 혹은 춤일지 모르는 것이 무대 위에서 만났다. ‘춤과 춤이 아닌 것의 대대(待對)’라는 개념으로 펼쳤다. 대대는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동시에 대립한다는 뜻으로 동양학의 굵직한 철학 중 하나다. 


춤과 춤이 아닌 것. 이 두 대상이 아주 빈틈없이 명확하게 존재할 때 생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대라는 개념이 춤으로 들어왔다. 춤과 춤이 아닌 것은 사람들에게 독립적으로 읽히는 사건이다. 두 사건이 무대 위해서 엎치락뒤치락한 게 <댄스를 부탁해 ‘5’>였다. 몸이라는 것이 춤의 완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몸을 벗어난 것이 더 춤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몸의 가능성과 춤을 연결 짓는 작업은 ‘몸의 회귀’라는 거대한 주제와 만났다. 회귀. 본래의 자리와 돌아갈 곳을 전제하고 있는 단어. 춤추는 몸, 몸의 춤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인간 몸의 생기. 빛나는 재기발랄함. 이런 쪽과 가까우면 좋겠다. 몸의 생기를 발휘하기에 이 시대의 제약 조건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을 잃고 있으니 회복하자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당연히 회복만으로 춤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분명한 건 너무나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회복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 같다.?



밝넝쿨 안무가는 집에 스승과 함께 산다고 했다. 거실과 다락으로 연결된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스승.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미끄러져도 매일 몇 차례나 오르락내리락하는 스승. 이제 겨우 두 살이지만 죽음도 두려워 보이지 않는 스승. ‘회귀하는 몸’에 대한 감각은 2011년 탄생한 아이를 돌보고 양육하며 확장되는 중이었다. 


아이는 현실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었다. 육아하면서 막연하게 춤을 상상하기보단,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리서치하는 환경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대하고 관계 맺는 활동 자체가 공연이 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아이와 놀며 만든 것을 작업으로 옮겼다. 하다 보니 사심도 생기더라. 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걸 만들다 보니 발달에 도움이 된다면 내 아이의 친구들도 같이 보면 좋겠고. 다섯 살 때 만든 건 관객 연령 5세, 여섯 살 때 만든 건 6세. 이런 식으로 아이와의 시간을 지표로 삼았다. 보편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렇더라. 6세 기준 공연은 4세 아이는 공감하기 어려워했다. 아이와의 시간을 작업화한 것이라서. 



만 5세 이상 관람이 가능했던 <공상 물리적 춤>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부터 넓고 거대한 곳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아니면 너무 작아서 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으로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몸을 믿어요. (…) 신나게 달려 그곳으로 가요. 가장 먼저 물병을 챙겨요. 장난감도 챙기고. (…) 어쩌면 하늘 위를 날아서 가야 할지 모르니 커다란 풍선도 잊지 말고요. 그곳이 어딘지 아나요? 그곳은 원래 우리가 있던 자리랍니다. 언제나 있는 그곳이요” 어린이 관객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일차적이고 단순한 반응이 많기 때문에 작업 자체도 영향을 받았다. 설명하기보단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방향도 조금씩 바뀌고. 하지만 내 아이는 무럭무럭 계속 자랄 것이기 때문에 이 작업 자체는 나에게 힘이 없어질 수 있을 거라는 고민도 하고 있다. 내 아이가 많은 아이를 대변할 수는 있지만 모든 아이를 대변할 수 없듯이, 이걸로 다 담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구분, 그 경계선에 머물고 있는 것이 밝넝쿨 안무가에게는 선명해 보였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자신에게 던지고 싶었던 물음이 실은 따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춤의 본질을 묻는 말이 아니었다. 되려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대체 왜 춤의 본질을 궁금해하는가? 춤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은 온통 흐리고 뿌옇고 모순되고 분명하지 않는 것투성인데. 질문이 가진 힘에 관한 대화 끝에 그가 발견한 통찰을 꾹꾹 눌러 적어본다. 


역설적이지 않으면 힘이 없으니까. 우리가 땅을 딛고 살 수 있는 것도 역설적인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설이 없는 것은 연소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선명한 것과 선명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감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선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진실이 아닌 경우가 되게 많으니까.



그와의 대화는 몸으로 시작해 춤을 휘감아 삶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였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여행길 같은 이야기. 

진행 ㅣ 보코 소영 
기록 ㅣ 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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